세계는 왜 전쟁이 오기 전에 생존을 준비하는가. 세계 곳곳에서 이상한 풍경이 펼쳐지고 있다. 미국과 유럽, 일본을 비롯한 여러 나라 정부가 국민에게 비상식량과 식수, 라디오, 현금, 의약품을 준비하라고 권고한다. 72시간에서 일주일, 국가와 지침에 따라서는 그 이상의 자립 능력을 요구한다. 33개국의 비상대비 권고를 정리한 최근 보도에는 유럽 국가 17곳이 포함됐다. 정부가 국민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간결하다.
전기와 통신이 끊기고, 물류가 멈추고, 외부의 구조가 도착하지 않는 상황을 상정하라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재난 안내일까. 물론 홍수와 산불, 감염병, 정전도 대비 대상이다. 그러나 지정학적 긴장과 사이버 공격, 적대국의 사보타주까지 공식적인 위험 목록에 함께 등장했다는 사실은 가볍지 않다. 세계는 아직 전쟁을 선포하지 않았지만, 전쟁이 일상의 기능을 멈추게 할 가능성에 대비하기 시작했다.
이 불안의 밑바닥에는 통치의 정당성을 둘러싼 오래된 질문이 다시 떠오르고 있다. 국가는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공동선은 누가 정의하며, 개인의 자유는 어디까지 보장돼야 하는가. 다수의 선택은 언제나 정당한가. 국가가 평등과 공동체의 이름으로 개인의 권리를 제한할 수 있는가. 반대로 자유와 시장의 이름으로 사회적 약자의 삶을 외면해도 되는가. 공화정이라는 말의 뿌리에는 공동의 것, 공동의 이익이라는 뜻이 놓여 있다. 그러나 공동선은 권력을 가진 자가 독점적으로 정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자유공화정은 개인의 기본권과 권력의 제한, 법치와 책임을 강조하고, 민주공화정은 인민주권과 정치적 참여, 사회적 연대와 평등을 강조하는 사상적 지평으로 이해할 수 있다. 두 전통은 반드시 적대하는 체제가 아니다. 오히려 현대의 헌정 민주국가는 자유와 민주를 함께 지켜야 한다. 문제는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을 삼켜버릴 때 발생한다. 자유를 빼앗은 다수의 지배도, 시민의 의사를 배제한 권력의 통치도 공화정의 이름을 빌릴 수는 있어도 공화정의 정신을 온전히 구현하지 못한다.
오늘의 세계질서는 바로 이 질문을 둘러싸고 흔들리고 있다. 미국과 유럽을 중심으로 한 자유민주주의 국가들은 기존의 국제규범과 동맹, 개방된 해상교통로와 경제질서를 지키려 한다. 반면 중국과 러시아는 미국 중심의 질서에 도전하며 자신들의 안보와 영향권, 국제적 발언권을 확대하려 한다. 그러나 이를 단순히 자유진영 대 사회주의 진영이라는 낡은 구도로만 설명해서는 안 된다. 중국의 당국가 체제와 러시아의 권위주의적 민족주의는 서로 다르며, 북한의 세습적 통치체제까지 같은 이념으로 묶을 수도 없다.
그럼에도 이들 사이의 전략적 협력과 군사·기술 협력이 기존 질서에 압박을 가하고 있다는 점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NATO는 러시아의 사이버 공격과 핵심 기반시설 사보타주, 전자교란, 허위정보와 정치적 영향력 행사를 하이브리드 위협으로 지목하고 있다. 유럽연합도 이러한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민간과 군사, 정부와 기업, 시민사회를 함께 묶는 대비체계를 구축하고 있다. 지금의 대립은 단순한 국경선의 문제가 아니다. 누가 국제규칙을 만들고, 누가 그 규칙을 집행하며, 어떤 가치가 국가와 사회를 지탱할 것인가를 둘러싼 경쟁이다.
우크라이나에서 중동으로, 호르무즈 해협에서 대만해협과 남중국해로 이어지는 긴장은 서로 다른 지역에서 발생하지만 세계경제와 안보의 혈관을 공유한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유럽의 안보구조를 흔들었고, 미국·이스라엘과 이란의 충돌은 에너지 수송로와 국제유가에 직접적인 충격을 주었다. 호르무즈 해협의 불안은 중동에만 머물지 않는다. 원유와 가스 가격, 해상보험료, 운송비와 식량가격을 거쳐 세계 각국의 가계와 기업에 도달한다. 대만해협의 긴장은 반도체와 해상 물류, 동아시아의 군사적 균형을 흔들 수 있다.
유럽연합이 2026년의 주요 지정학적 위험으로 우크라이나 전쟁의 확전, 대만해협과 남중국해의 긴장, 해저 케이블에 대한 사보타주, 한반도의 긴장을 함께 열거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세계의 여러 전선이 하나의 지휘체계로 움직인다는 증거는 없다. 그러나 한 지역의 위기가 다른 지역의 경제와 안보를 흔들고, 그 충격이 다시 국가 간 갈등을 키우는 연결 구조는 이미 현실이 됐다. 전쟁은 더 이상 전선의 지도만으로 읽을 수 없다.
더욱 두려운 변화는 전쟁의 문턱이 낮아지고 전장의 범위가 넓어졌다는 점이다. 과거에는 군대가 국경을 넘고 포탄이 떨어져야 전쟁의 시작을 실감했다. 이제는 전력망을 겨냥한 사이버 공격 하나가 병원과 공장, 금융거래와 가정의 일상을 멈출 수 있다. 해저 통신케이블이 끊기고 항만의 물류시스템이 마비되며 위성항법과 통신이 교란되면, 총성이 없어도 사회는 위기 속으로 들어간다. 허위정보는 시민을 서로 의심하게 만들고, 정치적 분열은 위기 대응을 늦춘다. 경제적 압박은 군사적 공격보다 먼저 국민의 생활을 흔들 수 있다.
이것이 하이브리드 전쟁의 위험이다. 공격과 평화, 군사와 민간, 외부의 적대 행위와 내부의 사회적 취약성이 한데 얽힌다. 그러므로 각국의 비상대비 권고는 전쟁이 임박했다는 직접적인 증거라기보다 국가 기능이 복합적인 충격에 노출돼 있다는 정책적 경고로 읽어야 한다. 정부가 국민에게 물과 식량, 라디오와 현금을 준비하라고 말하는 시대는 국가가 모든 위험을 혼자 감당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시대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한국은 어디에 서 있는가. 한국은 세계질서의 변화를 멀리서 관찰하는 나라가 아니다. 북한과 군사적으로 대치하는 휴전국이며, 미국과 동맹을 유지하면서 중국과 깊은 경제적 관계를 맺고 있다. 반도체와 배터리, 에너지 수입과 해상 물류에 대한 의존도도 높다.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뿐 아니라 사이버 공격, GPS 교란, 통신망과 전력망의 교란, 항만과 해저 기반시설에 대한 위협까지 국가안보의 범위에 넣어야 한다.
북한의 휴전선 일대 군사시설 강화와 남북 간 군사적 소통의 약화도 우발적 충돌을 관리하기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다. 그렇다고 모든 움직임을 전쟁 준비로 단정하거나 국민의 불안을 키우는 것이 해법은 아니다. 오히려 정부가 해야 할 일은 위험을 정확히 공개하고, 국민이 신뢰할 수 있는 대피·통신·의료·물류 계획을 마련하며, 정권의 성향과 무관하게 국가의 기본 기능을 지킬 수 있는 제도를 구축하는 것이다. 비상대비는 공포를 유통하는 일이 아니라 시민의 생명과 존엄을 지키는 공공의 책임이다. 한국이 준비해야 할 것은 전쟁의 승리만이 아니라 전쟁을 막고, 위기를 견디며, 평화를 회복할 능력이다.
제3차 세계대전은 불가피한가. 누구도 그 답을 미리 알고 있지 않다. 세계 각지의 전쟁과 긴장이 동시에 존재한다고 해서 그것들이 반드시 하나의 세계대전으로 합쳐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지금 필요한 것은 불가피론의 확산이 아니라 충돌을 억제할 외교와 규범, 동맹의 책임과 상호 억제의 복원이다. 그러나 기존 질서가 갈등을 조정하지 못하고, 강대국이 힘으로 규칙을 바꾸려 하며, 각국의 국내 정치가 타협을 배신으로 취급하기 시작한다면 전쟁의 위험은 커질 수밖에 없다.
1차 세계대전은 제국의 경쟁과 동맹의 연쇄 속에서 번졌고, 2차 세계대전은 전체주의의 팽창과 국제사회의 억제 실패 속에서 인류를 파국으로 몰아넣었다. 오늘의 세계는 그때와 다르다. 핵무기와 사이버전, 위성·통신망, 세계화된 공급망이 얽힌 충돌은 과거의 전쟁과 비교할 수 없는 규모의 피해를 낳을 수 있다. 그렇기에 다음 세계대전은 승리한 국가가 새로운 질서를 설계하는 전쟁이 아니라, 승자와 패자를 가리지 않고 인류의 삶을 파괴하는 전쟁이 될 가능성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공화정의 목적은 권력의 영속이 아니라 시민의 공동선을 지키는 데 있다. 자유는 공동체를 파괴하는 방종이 아니며, 민주주의는 다수의 이름으로 소수의 권리를 지우는 면허가 아니다. 세계가 다시 무기를 세는 동안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어느 진영의 우월성이 아니라 인간의 자유와 존엄, 법 앞의 평등, 그리고 전쟁 없이 공동의 미래를 결정할 수 있는 질서다.
세계가 생존을 준비하는 지금, 인류가 먼저 준비해야 할 것은 제3차 세계대전이 아니라 제3차 세계대전을 막아낼 정치적 지혜다.
참고문헌
- 유럽연합 집행위원회, EU Preparedness Union Strategy, 2025년 3월 26일. 72시간 자립 목표, 전사회적·범정부적 위기대응, 핵심 사회기능 보호 전략.
- 유럽연합 대외관계청(EEAS), Preparedness Union Strategy: reinforcing Europe’s resilience in a changing world, 2025년 3월 25일. 사이버 공격, 사보타주, 허위정보와 하이브리드 대응.
- NATO, Deterrence and Defence. 러시아의 사이버 공격, 핵심 기반시설 사보타주, 전자교란, 허위정보 및 정치적 영향력 행사에 대한 공식 위협 평가.
- European Council, Conclusions – 26 June 2025. 러시아의 하이브리드 활동과 핵심 기반시설 교란에 대한 유럽이사회 입장.
- Council of the European Union, Forward Look 2026 – Playing by new rules? 대만해협, 남중국해, 해저 케이블, 우크라이나, 중동 및 한반도 관련 지정학적 위험 전망.
- The Guardian, Tinned mackerel, hand-crank radios and bags for poo: crisis-prepping guides around the world, 2026년 10월 23일. 여러 국가의 비상대비 권고와 국가별 준비 기간 비교.
- Newsweek 국가별 비상대비 권고 현황을 인용한 WYDE Newsroom, 2026년 10월 30일. 33개국의 비상물자 권고 및 유럽 17개국이라는 집계. 미국의 일반 가정 권고와 군사기지 자립 목표는 구분할 필요가 있음.
- Council of the European Union, Hybrid threats. 러시아의 사보타주, 사이버 공격, 정보 조작 및 민주적 절차에 대한 개입 관련 자료.
- Council of the European Union, Forward Look 2026. 2026년 지정학적 위험 지역과 잠재적 확전 요인.
Socko/Gh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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