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석 더불어민주당 당대표의 국회 연설은 꽤 대담했다. 한마디로 압축하면 “대한민국, 이제 제발 강대국처럼 생각하자”는 선언이다. 미국의 압도적 패권은 과거보다 줄었고, 한국의 반도체·조선·AI 역량은 커졌으니 더 이상 미국을 무조건적인 ‘시혜적 강대국’으로만 바라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미국이 한국의 조선 능력을 필요로 하고, 반도체와 AI에서도 한국이 전략적 파트너가 될 수 있으니 한미관계 역시 일방적 의존관계가 아니라 거래와 협력의 관계로 바뀌고 있다는 주장이다.
꽤 그럴듯하다. 대한민국이 언제까지 “미국이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만 외칠 수는 없다. 이제는 “미국도 우리 없으면 곤란하지?”라고 물을 정도는 됐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여기서 묘한 문제가 하나 생긴다. 강국 의식을 가지라고 했더니 미국도 강국 의식으로 한국을 상대하기 시작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 동맹도 결국 계산서가 있는 국제정치이기 때문이다.
김민석 대표가 특히 강조한 대목은 미국의 변화다. 그는 미국 공화당 대통령들이 적대국과 관계를 개선해온 역사를 거론했다. 닉슨과 마오쩌둥, 레이건과 고르바초프, 부시와 베트남, 그리고 트럼프와 김정은이다. 특히 트럼프가 북한과 다시 만날 가능성을 높게 보고, 미·북이 전격적인 관계 개선을 한다면 북핵 문제에서 ‘선동결 후해결’ 같은 방식이 등장할 가능성까지 언급했다. 여기에는 상당히 현실적인 질문이 숨어 있다.
한국 대통령이 미국 대통령에게 “김정은 만나지 마십시오”라고 요구한다고 해서 트럼프가 그대로 들을 것인가? 국제정치에서는 동맹국의 희망과 미국 대통령의 이해관계가 언제나 일치하지 않는다. 트럼프가 김정은과의 정상회담을 다시 추진한다면 서울의 선택은 복잡해진다. 김민석 대표가 말한 ‘자주 안보역량 강화’가 바로 이 지점에서 등장한다. 미국이 북한과 거래할 가능성까지 계산한다면 한국도 자기 방어력을 스스로 키워야 한다는 것이다.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미국을 믿기 위해서가 아니라 미국의 선택까지 대비하기 위해 자주국방을 강화해야 하는 시대라니.
더 재미있는 것은 북한을 바라보는 시선의 변화다. 김민석 대표는 김정은의 ‘적대적 두 국가론’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지만, 이미 국제사회에서 사실상 두 국가로 존재해온 현실을 고려하면 이를 평화공존에 활용할 수 있을지 지혜를 모아야 한다고 했다. 과거의 통일론과는 상당히 다른 접근이다. 북한을 무너뜨려 하나의 국가로 만드는 시나리오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일단 살아남고, 공존하고, 시간을 벌자”는 현실주의적 접근에 가깝다.
그런데 이 논리가 트럼프의 대북정책과 만나는 순간 묘한 그림이 만들어진다. 워싱턴이 북한을 하나의 현실적인 협상 상대방으로 인정하고, 평양이 핵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은 상태에서 동결이나 관리 쪽으로 방향을 튼다면? 서울이 반대만 외치기는 쉽지 않다. 김정은은 핵을 들고 협상 테이블에 앉고, 미국은 북한과 거래하고, 한국은 자주국방을 강화한다. 이것이 김민석 대표가 말한 미래의 한반도일까. 그렇다면 ‘통일’보다 먼저 등장하는 단어는 뜻밖에도 ‘관리되는 공존’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연설의 중심에는 ‘대체불가 대한민국’이 있다. 반도체, 조선, AI, 데이터센터, 방산 등에서 미국과 중국 모두에게 필요한 나라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조선은 상징성이 크다. 미국이 군함을 필요로 하고 한국은 빠르고 경쟁력 있게 건조할 능력을 가지고 있다면, 한미관계는 단순히 군사동맹을 넘어 산업동맹으로 진화할 수 있다. AI 역시 마찬가지다. 미국의 AI 생태계와 한국의 반도체·데이터센터·제조능력이 결합하면 한국은 단순한 소비시장이 아니라 전략적 생산기지가 될 수 있다.
여기까지는 상당히 현실적인 국가전략이다. 문제는 ‘대체불가’가 되면 정말 미국이 한국을 더 존중할까, 아니면 더 비싼 가격을 요구할까라는 것이다. 미국 입장에서는 “한국이 중요하다”와 “한국이 미국 전략에 얼마나 협조하는가”는 별개의 질문이다. 반도체를 사주고 조선소를 이용하면서 동시에 방위비·무기구매·대중국 정책·주한미군 역할까지 계산할 수 있다. 강국이 된다는 것은 상대에게 요구할 권리가 생기는 동시에 상대도 더 많이 요구한다는 뜻이다.
김민석 대표가 중국 이야기를 꺼낸 것도 그래서 중요하다. 과거 국내 대기업들이 중국에서 완전히 철수하면 오히려 중국의 자체 기술개발을 촉진해 한국이 시장을 잃을 수 있다고 우려했다는 경험담, 그리고 지금 중국의 AI·반도체·로봇·우주·희토류·자율주행 등에서 급격한 추격이 진행되고 있다는 판단은 한 가지 현실을 보여준다. 한국은 미국 아니면 중국이라는 양자택일만으로 살아남기 어려운 나라라는 것이다.
미국과 중국 모두에게 필요한 기술과 생산능력을 갖춰야 한다는 김 대표의 ‘대체불가 전략’은 여기서 나온다. 하지만 바로 여기서 대한민국 외교의 난이도가 올라간다. 미국은 중국을 견제하고 싶고, 중국은 한국을 자기 편으로 끌어오고 싶다. 한국은 양쪽 시장과 기술, 공급망을 모두 필요로 한다. 그러니 한국이 강국이 되겠다고 선언하는 순간 워싱턴과 베이징은 박수를 치기보다 계산기를 두드릴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당신은 우리 편인가?”라는 질문이 따라오기 때문이다.
대일관계에 대한 변화도 같은 맥락이다. 김 대표는 젊은 세대가 과거 세대보다 일본에 대한 열등감과 거부감에서 벗어나 실용적 협력을 선호한다고 진단하면서 한일 경제공동체, AI 데이터센터, 해저케이블, 문화·관광 협력 등을 제안했다. 이것 역시 ‘강국 대한민국’이라는 사고방식과 연결된다. 일본과 경쟁하면서도 필요한 것은 협력하고, 미국과도 동맹하면서 당당하게 거래하고, 중국과도 경제적 이해관계를 관리하자는 것이다.
좋다. 그런데 그렇게 하려면 국내 정치부터 강국답게 변해야 한다. 김민석 대표 스스로 연설에서 정치혁신과 품격사회를 이야기했다. 외교에서는 실용을 말하면서 국내에서는 진영이 바뀔 때마다 상대방의 정책을 전부 부정한다면 ‘강국 의식’은 결국 구호가 된다. 강국은 목소리가 큰 나라가 아니라 상대가 누구든 자기 이익을 계산하고, 자기 원칙을 지키면서 협상할 수 있는 나라다.
결국 김민석의 연설은 이재명 정부에 꽤 불편한 숙제를 던진다. 연설의 결론은 명확하다. 미국의 압도적 우위가 과거와 같지 않고, 한국의 자주 역량은 커졌으니 이제 대한민국도 자기 힘으로 선택지를 넓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부터 진짜 시험이 시작된다. 트럼프가 북한과 전격적으로 거래한다면 서울은 어떻게 할 것인가. 미국이 중국 견제를 요구한다면 한국의 대중국 산업은 어떻게 보호할 것인가.
미국이 한국 조선소를 필요로 한다면 그 대가로 무엇을 요구할 것인가. 미국 AI 기업과 한국 기업이 손잡는다면 데이터와 기술의 주권은 어떻게 지킬 것인가. 일본과 협력하면서 과거사 문제는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 그리고 결정적으로 미국이 한국의 ‘자주’를 존중하면서도 동시에 미국의 전략에는 더 깊이 들어오라고 요구한다면? 여기서 김민석 대표의 ‘강국 의식’이 진짜 시험대에 오른다.
강국은 미국에 반대하는 나라가 아니다. 강국은 중국에 기대는 나라도 아니다. 강국은 북한의 핵을 인정하는 나라도 아니다. 강국은 동맹을 버리는 나라도 아니다. 강국은 동맹을 가지고도 자기 계산을 하고, 중국과 거래하면서도 자기 기술을 지키며, 북한과 공존을 모색하면서도 핵 앞에 굴복하지 않는 나라다. 그러니 앞으로의 한미관계에서 가장 재미있는 장면은 어쩌면 이것일 것이다.
한국이 “우리는 이제 강국입니다”라고 선언하는 순간, 미국이 웃으며 대답할지도 모른다. “그래? 그럼 강국답게 방위비도, 조선도, 반도체도, AI도, 중국 문제도, 북한 문제도 같이 계산해보자.” 그때 대한민국이 “예전처럼 미국이 알아서 해주시겠지”라고 말한다면 김민석의 강국론은 연설문에서 끝난다. 반대로 그때 “좋습니다. 그런데 한국의 국익도 계산서에 넣으시죠”라고 말할 수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미국이 한국을 필요로 하는 시대가 왔다면, 이제 한국도 미국의 필요를 활용할 줄 알아야 한다.
다만 한 가지는 잊지 말아야 한다. 강국 의식은 미국을 무서워하지 않는 데서 시작하지만, 미국을 만만하게 보는 순간 끝난다. 그리고 트럼프 시대의 국제정치는 그 차이를 아주 비싸게 가르쳐줄 가능성이 있다.
참고자료
김민석 교섭대표 국회 연설 — 「강국 대한민국」 논평
- 한국의 자주적 안보역량 강화
- 반도체·조선·AI 등 대체불가 국가역량 강조
- 트럼프의 대북 정상회담 가능성
- 북핵의 ‘선동결 후해결’ 가능성에 대한 대비
- 북한의 ‘적대적 두 국가론’을 평화공존의 현실로 활용할 가능성
- 미·중 박빙 경쟁에 대한 국가전략
- 한국 조선산업의 전략적 가치
- AI 데이터센터·반도체·미래대응기금
- 한일 경제협력 및 한일 경제공동체
- ‘강국 의식’과 정치혁신
Socko/Gh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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