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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시대, 영어교육 평가는 무엇을 측정해야 하는가— 수능 영어 절대평가의 한계에서 ‘영어 능력 평가’의 재설계까지

1. 영어교육 평가의 진짜 질문은 ‘몇 점인가’가 아니다

영어시험을 보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점수를 먼저 봅니다. 90점인가? 80점인가? 1등급인가? 그런데 영어교육 평가에서 더 중요한 질문은 따로 있습니다. 그 점수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영어시험에서 90점을 받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영어 단어를 많이 알고 있다는 뜻일까요? 문법 지식이 충분하다는 뜻일까요? 영어 지문을 잘 이해한다는 뜻일까요? 영어로 대화할 수 있다는 뜻일까요? 자신의 생각을 영어로 쓸 수 있다는 뜻일까요? 이들은 서로 다른 능력입니다.

따라서 좋은 영어평가는 단순히 점수를 산출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정의한 영어 능력을 얼마나 정확하게 측정했는가?”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영어교육 평가에서 말하는 평가구인(construct)의 문제입니다.

2. 수능 영어의 핵심 문제를 ‘절대평가’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이유

2018학년도부터 수능 영어에는 절대평가가 도입되었습니다. 당시 정책의 주요 취지는 영어 사교육 부담과 과도한 경쟁을 완화하고 학교 영어교육을 정상화하는 데 있었습니다. 그러나 절대평가로 바뀌었다고 해서 영어교육 평가의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절대평가와 좋은 평가가 같은 개념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절대평가는 점수를 다른 학생의 성적과 비교해 등급화하는 상대평가와 다른 방식입니다. 그러나 절대평가라고 해서 자동적으로

  • 실제 영어 능력을 잘 측정하거나
  • 교육과정을 잘 반영하거나
  • 영어 의사소통 능력을 평가하거나
  • 학생의 영어 성장 과정을 보여주는

평가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이제 논쟁의 초점을 “절대평가를 유지할 것인가?”에서 한 단계 더 이동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현재의 평가체제가 정의하고 있는 영어 능력은 무엇이며, 그것을 제대로 측정하고 있는가?” 이 질문이 출발점이어야 합니다.

3. 영어교육 평가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 ‘타당도’

교육평가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 중 하나가 타당도(validity)입니다. 쉽게 말하면, 시험이 측정하려고 하는 것을 실제로 제대로 측정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입니다. 예를 들어 말하기 능력을 평가한다고 하면서 문법 객관식 문제만 낸다면 어떨까요?

문법 지식은 말하기에 필요한 요소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문법 문제를 잘 푸는 것만으로 실제 말하기 능력까지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반대로 학생에게 영어로 자유롭게 말하게 하는 평가도 무조건 좋은 평가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평가자의 판단이 크게 달라진다면 신뢰도가 낮아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영어평가는 항상 두 가지 문제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야 합니다. “실제 영어 사용을 얼마나 잘 반영하는가?”와 “학생을 얼마나 일관되고 공정하게 평가할 수 있는가?”입니다. 이것이 영어교육 평가가 어려운 이유입니다.

4. 수능 영어는 ‘나쁜 평가’가 아니라 ‘목적이 다른 평가’다

여기에서 수능 영어를 단순히 실패한 영어평가라고 규정하는 것도 적절하지 않습니다. 수능은 매우 많은 수험생을 제한된 시간 안에 평가해야 하는 대규모 고위험 평가(large-scale high-stakes assessment)입니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조건이 필요합니다.

  • 전국적으로 동일한 기준
  • 높은 채점 일관성
  • 제한된 시험 시간
  • 대규모 응시자 처리
  • 대학입시에 활용할 수 있는 신뢰도
  • 문항의 공정성

이러한 조건을 고려하면 객관식 문항은 상당한 장점을 갖습니다. 문제는 다른 곳에 있습니다. 대규모 선발시험의 특성이 학교 영어교육 전체의 목표를 지배할 때 발생하는 문제입니다. 수능에서 측정하기 어려운 능력이 학교에서도 중요하지 않은 능력처럼 취급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평가의 교육적 영향(washback effect) 문제가 등장합니다.

5. 시험이 수업을 바꾼다 — 영어교육에서 ‘워시백’의 문제

교육평가에서 매우 중요한 개념이 washback, 즉 평가가 교수·학습에 미치는 영향입니다. 시험이 읽기와 문제풀이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면 교실에서도 읽기와 문제풀이가 중요해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시험에서 말하기를 평가하지 않는다면 말하기 교육에 투입되는 시간도 상대적으로 줄어들 수 있습니다.

시험에서 단어의 정확한 의미를 묻는다면 단어 암기가 중요해집니다. 시험에서 복잡한 글을 빠르게 읽어야 한다면 속독과 문제풀이 전략이 발달합니다. 따라서 평가를 바꾸지 않고 교육만 바꾸기는 어렵습니다. 평가가 교육과정을 끌고 가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영어교육 평가를 단순한 시험제도 문제가 아니라 교육과정의 문제로 바라봐야 하는 이유입니다.

6. ‘영어 능력’을 하나의 점수로 표현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영어 능력을 하나의 숫자로 나타내는 것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학생 A가 영어 읽기는 매우 뛰어나지만 말하기가 약할 수 있습니다. 학생 B는 읽기 능력은 보통이지만 영어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능력이 뛰어날 수 있습니다.

학생 C는 영어로 의사소통은 잘하지만 학술적인 영어 글을 읽는 능력이 부족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세 학생에게 모두 “영어 85점”이라는 하나의 숫자를 부여하면 중요한 정보가 사라집니다. 그래서 국제적인 언어평가에서는 듣기, 읽기, 쓰기, 말하기와 같은 영역을 구분하여 평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CEFR 역시 언어 능력을 단순한 문법 지식으로 제한하지 않고 언어 활동과 의사소통, 상호작용, 중재 등의 다양한 측면에서 바라봅니다. 즉 미래의 영어평가는 총점 하나보다 어떤 영어 수행이 가능한가를 보여주는 방향으로 발전할 필요가 있습니다.

7. 영어평가의 네 가지 기능을 다시 보자

영어교육 평가를 설계할 때는 평가의 목적부터 달라져야 합니다.

  • ① 진단평가-학생이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 파악합니다. 목적은 등급을 매기는 것이 아니라 다음 학습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 ② 형성평가-학습 과정에서 학생의 이해와 수행을 확인합니다. 틀렸다는 사실보다 왜 틀렸는지 그리고 다음에는 어떻게 개선할 것인지가 중요합니다.
  • ③ 총괄평가-학습이 끝난 뒤 성취 수준을 종합적으로 판단합니다. 학교 시험이나 일정한 성취도 평가가 여기에 해당할 수 있습니다.
  • ④ 선발평가-대학입시처럼 많은 학생 가운데 일정한 기준에 따라 선발하기 위한 평가입니다. 수능 영어는 이 기능이 매우 강합니다.

문제는 이 네 가지 목적을 하나의 시험으로 모두 해결하려 할 때 발생합니다. 선발시험이 진단평가의 역할까지 할 수는 없습니다. 학교 수행평가가 전국 단위 선발시험과 동일한 신뢰도를 갖기도 어렵습니다. 따라서 미래 영어교육은 평가의 분업이 필요합니다.

8. AI 시대에는 ‘정답’보다 ‘과정’이 중요해진다

AI 시대가 되면서 영어평가에는 새로운 문제가 등장했습니다. 학생이 영어 에세이를 제출했습니다. 그 글은 매우 훌륭합니다. 그런데 질문이 생깁니다.

  • 학생이 직접 쓴 것일까요?
  • AI가 작성한 것일까요?
  • AI의 도움을 받아 수정한 것일까요?
  • 학생이 자신의 생각을 먼저 작성하고 AI를 활용한 것일까요?

이 네 가지는 교육적으로 전혀 다릅니다. 따라서 AI 시대에는 최종 결과물만 평가하는 방식이 점점 어려워질 수 있습니다. 대신 과정평가(process assessment)가 중요해집니다. 예를 들어 영어쓰기 과제를 다음처럼 평가할 수 있습니다.

  • ① 자신의 초안 작성
  • ② AI 피드백 요청
  • ③ AI의 제안 검토
  • ④ 수정 이유 설명
  • ⑤ 최종본 작성
  • ⑥ 무엇이 달라졌는지 성찰

이렇게 하면 AI를 사용했는지가 평가의 문제가 아니라, AI를 어떻게 사용했는가가 평가의 대상이 됩니다.

9. AI 시대의 영어평가에는 ‘AI 리터러시’도 들어온다

여기서 영어교육 평가의 새로운 문제가 등장합니다. AI가 영어 문장을 만들어준다고 해서 그 문장이 반드시 정확한 것은 아닙니다. 자연스러운 문장처럼 보여도 맥락에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문화적으로 부적절한 표현일 수도 있습니다. 전문적인 의미가 달라질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미래의 영어학습자는 AI의 영어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아니라,

AI가 제시한 영어를 평가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이것은 기존 영어능력과는 조금 다른 능력입니다. 예를 들어 학생에게 다음과 같은 과제를 줄 수 있습니다. “AI가 작성한 다음 영어 이메일에서 부적절한 표현 세 가지를 찾고, 왜 수정해야 하는지 설명하시오.”

이제 영어평가는 단순한 언어지식 평가가 아닙니다. [영어 이해력 + 비판적 사고 + AI 활용능력]…을 함께 평가할 수 있습니다.

10. 그렇다면 미래 영어평가는 무엇을 평가해야 하는가

앞으로의 영어평가에서는 최소한 다음과 같은 영역을 구분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평가 영역평가 질문
영어 지식단어·문법·표현을 알고 있는가?
이해영어 정보를 정확하게 이해하는가?
적용배운 영어를 새로운 상황에서 사용할 수 있는가?
표현자신의 생각을 영어로 표현할 수 있는가?
상호작용질문하고 응답하며 의미를 조정할 수 있는가?
비판적 사고영어 정보의 의미와 타당성을 판단할 수 있는가?
중재이해한 정보를 다른 사람에게 재구성하여 전달할 수 있는가?
AI 활용AI의 영어 결과를 검토하고 적절하게 활용할 수 있는가?
성찰자신의 영어 사용과 오류를 분석하고 개선할 수 있는가?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모든 능력을 하나의 시험에 넣는 것이 아닙니다. 평가 목적에 따라 적절한 평가방법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11. 객관식 시험을 없애는 것이 해답은 아니다

영어교육 평가에 대한 논의가 나오면 흔히 “객관식 시험을 없애야 한다.”는 주장으로 이어집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지나친 단순화입니다. 객관식 평가에는 장점이 있습니다. 대규모 평가가 가능하고 채점의 일관성을 확보하기 쉽습니다.

특정한 영어 이해 능력을 효율적으로 측정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객관식이냐 주관식이냐의 이분법이 아닙니다. 어떤 능력을 측정하기 위해 어떤 평가방법을 선택하는가입니다. 예를 들어,

  • 어휘 지식 → 객관식·단답형
  • 읽기 이해 → 선택형·단답형
  • 요약 능력 → 서술형
  • 논리적 표현 → 쓰기 수행평가
  • 말하기 → 구두 수행평가
  • 상호작용 → 대화 수행평가
  • AI 활용 → 과정 포트폴리오처럼 평가방법을 다르게 설계할 수 있습니다.

12. 영어교육의 미래는 ‘한 번의 시험’에서 ‘평가 포트폴리오’로

이러한 관점에서 미래 영어교육에서 중요한 개념이 포트폴리오 평가입니다. 학생이 1년 동안 무엇을 했는지를 모아 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 영어 독서 기록
  • 영어 요약문
  • 영어 발표
  • 대화 활동
  • 프로젝트 결과물
  • AI 활용 기록
  • 자기평가
  • 교사 피드백
  • 수정 전·후 결과물

등을 축적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학생에게 단순히 “영어 87점”이라는 정보만 남는 것이 아니라, “읽기 능력이 성장했고, 말하기는 아직 유창성이 부족하며, AI를 활용한 글 수정 능력은 빠르게 향상되고 있다.”와 같은 구체적인 학습 정보가 남습니다. 이것이 평가가 학습을 위한 데이터가 되는 방식입니다.

13. 결국 평가가 바뀌어야 영어교육이 바뀐다

영어교육에서 가장 어려운 문제는 좋은 교육방법을 찾는 것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오히려 무엇을 평가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이 더 어려운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평가가 교육의 방향을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 학생은 평가받는 것을 공부합니다.
  • 교사는 평가되는 내용을 가르칩니다.
  • 학교는 평가 결과를 관리합니다.
  • 학부모는 평가 결과를 통해 교육의 효과를 판단합니다.

따라서 영어평가가 바뀌지 않는다면 영어교육의 변화도 제한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14. 영어교육의 질문을 ‘몇 점인가?’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로

AI 시대 영어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변화는 AI 자체가 아닙니다. 영어 능력에 대한 정의가 달라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과거에는 영어를 잘한다는 것이 단어를 많이 알고, 문법을 정확하게 알고, 영어 지문을 빠르게 이해하고, 시험 문제를 잘 푸는 능력으로 설명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물론 이러한 기초 능력은 여전히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앞으로의 영어 사용자는 영어 정보를 이해하고, 필요한 정보를 선별하고, 자신의 생각을 영어로 표현하고, 상대방과 상호작용하고, 다른 사람에게 정보를 재구성해 전달하고, AI가 생성한 영어를 검토하고, 그 결과를 자신의 목적에 맞게 활용해야 합니다.

따라서 영어교육 평가도 달라져야 합니다.

  • 지식 평가에서 수행 평가로.
  • 결과 평가에서 과정 평가로.
  • 단일 점수에서 다차원적 역량으로.
  • 정답 확인에서 성장 정보 제공으로.…그리고 AI 시대에는 여기에 하나가 더해져야 합니다.
  • AI가 만든 영어를 사용하는 능력뿐 아니라, 그 영어를 판단하는 능력.

수능 영어 절대평가의 논쟁도 결국 여기에서 다시 출발해야 합니다. 문제는 절대평가냐 상대평가냐만이 아닙니다. 변별력이 있느냐 없느냐만도 아닙니다. 더 중요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영어교육을 통해 기르고 싶은 능력을, 현재의 평가는 정말 제대로 측정하고 있는가?”

이 질문에 답하지 않은 채 난이도만 조절한다면 평가제도가 바뀌어도 영어교육의 본질적인 문제는 반복될 수 있습니다. AI 대전환 시대의 영어교육 평가가 가야 할 방향은 시험을 더 어렵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영어로 무엇을 알고 있는지를 넘어, 영어로 무엇을 이해하고, 표현하고, 판단하고, 소통하며, AI와 함께 무엇을 해낼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평가체계를 만드는 데 있습니다. 결국 좋은 영어평가는 학생을 줄 세우는 데서 끝나는 평가가 아니라, 학생이 지금 무엇을 할 수 있고, 다음에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평가여야 합니다.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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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 ALTE, The ALTE Framework — 언어능력 수준과 실제 수행에 관한 국제 평가 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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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보기 : AI 시대, 영어교육 평가는 무엇을 측정해야 하는가— 수능 영어 절대평가의 한계에서 ‘영어 능력 평가’의 재설계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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