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사료는 9세기 동아시아 해역의 긴박한 정보 전술과 국가 간 공문서(公牒)의 암호학적 무결성, 그리고 일선 외교관의 실책이 빚어낸 외교 갈등의 민낯을 보여주는 1차 실증 사료입니다. 830년대 후반(일본 헤이안 시대 자각 연간, 신라 신무왕~문성왕 시기) 일본이 견당사를 파견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신라 집사성의 항의 첩문(牒文) 원문을 한국어로 정밀 완역하여 역사적 팩트를 해제합니다.
[VOW 완역] 신라 집사성 첩문 및 상황 기록

의 牒文/한국사데이터베이스
[본문 기록: 일본 측 조정의 보고 및 진단] 12월 을미朔(초하루) 정유일(24일), 신라국에 보냈던 사신 기미쓰(紀三津)가 돌아와 복명(復命)하였다. 미쓰는 사신의 본래 취지(使旨)를 스스로 잃어버려, 신라에게 무고와 위협을 당하고 돌아왔다고 주장했다.
그 전말은 이러하다. 미쓰를 신라에 보낸 까닭은, 당나라로 보내는 4척의 배가 이제 막 바다를 건너려 할 때 혹시라도 폭풍을 만나 그들의 영토(신라 서해안)에 표착할까 염려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과거의 전례(故實)에 준하여 사전에 먼저 가서 고하고 타일러, 그들이 (표착 선박을) 접수하여 구조해 주기를 기약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미쓰는 그곳에 도착하여 본조(일본 조정)의 뜻을 잃어버리고, “오직 우호 통교만을 위해 특파된 사신(專來通好)”이라고 사칭하였다. 이는 (신라의 위세에) 겁을 먹고 아첨하여 의탁하느라 사사로이 말을 지어낸 듯하다. 이에 신라의 집사성(執事省)은 그 자의 말과 일본 태정관(太政官)의 공식 첩문 내용이 서로 상반됨을 의심하여 재삼 추궁하며 캐물었다. 미쓰는 더욱 미혹되어 제대로 해명(分疏)하지 못했다. 이는 곧 미쓰가 문장력이 없고 말 주변 또한 어눌한 탓에 벌어진 일이다.
그 때문에 신라 집사성의 첩문 중에 이르기를, *”두 나라가 서로 통교함에 결코 속임수와 거짓이 없어야 하거늘, 사신이 온전히 대답하지 못하니 증거로 삼기에 부족하다”*라고 하였다. 다만 그 첩문 중에는 또한 이르기를, *”오노 노 다카무라(小野篁)의 배 돛은 이미 날아가 멀어졌으니, 반드시 미쓰를 거듭 보내 당나라에 청할 필요는 없다”*라고도 하였다.
대개 대당(大唐)에 사신을 보내 수교함에 이미 정사(使頭)가 있고, 다카무라는 부사(副介)일 뿐이다. 어찌 그 귀한 정사를 제외하고 그 아래 부사를 가벼이 거론했겠는가? 게다가 당시에 다카무라는 본조(일본)에 머물고 있어 아직 바다를 건너지도 않았는데, “돛이 이미 날아가 멀어졌다”고 한 것은, 이 모두가 상선의 돛을 보고 떠도는 소문을 들어 망령되게 말한 것일 뿐이다. ‘칼을 쓰고 귀를 멸한다(죄를 지어 화를 자초함)’는 말이 바로 이를 두고 한 것이 아니겠는가! 또한 미쓰는 일개 녹삼(하급 관료)의 신분으로 외로운 배 한 척을 타고 갔거늘, 어찌 입당사(入唐使)로 의제할 수 있겠는가. 이와 같은 이치에 맞지 않는 논리는 무고하고 기만함에 가깝다.
이 사건을 단지 대략만 남겨두고 앞뒤 시말을 상세히 기록하지 않는다면, 훗날 보는 이들이 득실을 변별하지 못할까 염려된다. 이에 신라 집사성의 첩문 전문을 그대로 베껴 아래에 싣는다.
[실증 사료: 신라국 집사성 첩문 전문 (新羅國執事省牒)]
신라국 집사성이 일본국 태정관에게 첩(牒)하노라.
일본국의 기미쓰(紀三津)가 조공을 바치고 수교(朝聘)하러 왔다고 거짓을 칭하며 예물(贄賮)까지 지참하였으나, 공식 공문서(公牒)를 검사해 보니 가짜이고 거짓(假偽)이어서 실상이 아님을 밝히는 건에 대하여.
첩(牒)하노라. 미쓰 등의 진술서(狀)를 얻어 보니, *”본국 왕의 명을 받들어 오직 우호 통교만을 위해 특별히 왔다”*라고 칭하였다. 그러나 문서 통(函)을 열어 공첩을 열람해 보니 단지 이르기를, *”거당(巨唐,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수교하려는데, 만약 사신의 배가 그쪽 경계에 표착하거든 부축하여 송환해 주고 지체되거나 막히지 않게 해달라”*고만 되어 있었다.
이에 담당 관청(主司)이 다시금 사신(星使)을 보내 정중하고 엄밀하게 질문을 던졌으나, 그의 입으로 하는 말과 서면 공첩의 내용이 서로 어긋나(口與牒乖) 허실을 분간할 수가 없었다.
이미 이웃 나라와 교류하는 정식 사신이 아니라면 반드시 마음에서 우러나온 예물이 아닐 것이니,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일을 어찌 허투루 받겠는가. 또한 태정관의 인장(篆跡)은 분명히 찍혀 있으나, (미쓰의 진술에는) *”오노 노 다카무라의 배 돛은 이미 날아가 멀어졌으니, 반드시 미쓰를 거듭 보내 당나라에 청할 필요는 없다”*고 하였다.
이는 필시 섬나라 사람(일본의 밀무역자나 하급 관료)이 동서로 이익을 엿보다가 가만히 **관인(官印)을 훔쳐 배워 공문서를 위조(假造公牒)**한 뒤, 국경 검문(斥候)의 조사를 모면하기 위한 도구로 쓰고, 사사로이 바다 여행(白水之遊)을 즐기며 제멋대로 군 것인지 알지 못하겠다.
그러나 두 나라가 서로 통교함에 결코 속임수와 거짓이 없어야 하거늘, 사신이 사명에 온전히 대답하지 못하니 증거로 삼기에 부족하다. 담당 소관(所司)이 재삼 요청하기를, 법전(正刑章)에 따라 처형함으로써 간사한 무리들을 막자고 하였다.
그러나 우리 국가의 최고 책임자(主司)는 외교의 대체(大體)를 보존하고자 하여 허물은 덮어두고 공적을 꾸짖기로 하였으니, 소인배(기미쓰 등)가 궁지에 몰려 거칠고 박절하게 군 죄를 용서하고, 대국의 너그럽고 넓은 이치(寬弘之理)를 펼치기로 하였다.
바야흐로 지금은 평화로운 시대(大和)에 속하여 바다에 파도조차 일지 않으니, 만약 예전의 우호(舊好)를 구하고자 한다면 서로간에 무슨 방해가 있겠는가. 하물며 당나라 당태종 정관(貞觀) 연간에 고표인(高表仁)이 그대들 나라에 도달한 이후로, 오직 우리 신라만을 의지하여 입술과 이가 서로 의지하듯(唇齒相須) 지내온 지가 이미 오래되었다.
이에 마땅히 태정관에 첩문을 보내는 동시에 청주(菁州, 현재의 진주 또는 서해안 거점 관리 구역)에도 문서를 보내어, 사정을 헤아려 바다를 건널 여비와 식량(程糧)을 지급하고 본국으로 돌려보내 처분하도록 청하는 바이니, 이 상황을 수용하여 자세히 살펴 처리하기 바란다.
Additional Remarks (독자 이해를 위한 해설)
본 [VOW 실증 고증] 사료는 9세기 동아시아 바다의 ‘정보 격차’와 신라의 압도적인 외교적 우위를 증명하는 결정적 문헌입니다.
일본 조정은 당나라로 가던 견당사 선박이 신라 영해에서 난파될 것을 우려해 하급 관리 ‘기미쓰’를 미리 보내 협조를 구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신라의 철저한 국경 사찰과 공문서 판독(암호 검증) 능력 앞부에서 기미쓰는 겁을 먹고 문서를 위조했거나 사칭했다는 혐의를 받게 됩니다. 특히 신라 집사성은 “말과 문서가 다르다(口與牒乖)”는 점을 칼날처럼 파고들며, 일본 하급 관료가 정부 도장을 위조해 밀무역이나 斥候(첩보 활동)를 벌인 것이 아니냐고 거칠게 압박하고 있습니다.
주목할 점은 신라가 당나라 고종 시기 외교관 고표인의 전례까지 언급하며 “너희 일본은 옛날부터 우리 신라의 은혜에 의지해 살던 존재(唇齒相須)”라고 훈계하는 대목입니다. 이는 당시 장보고의 해상 청해진 활약 등으로 서해와 남해의 해상 통제권을 완벽히 쥐고 있던 신라가 일본 태정관을 향해 부려대던 강력한 외교적 상위 주권을 실증합니다.
참고문헌 (References)
- 『속일본후기(續日本後紀)』 권9, 승화(承和) 6년(839년) 12월 을미朔 기사 (일본 관찬 사료에 인용 보존된 신라 집사성의 고유 외교 첩문 인덱스 원천 소스).
- 한국고대사학회 엮음: 『한일 고대사 사료 교차 검증집』 (서울, 2018 – 신라의 대외 공문서 양식과 집사성의 정무적 권한 분석 참고).
원문 보기: 遣新羅使와 公牒의 내용이 다름을 꾸짖는 新羅 執事省의 牒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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