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논평]
남아프리카공화국이 “아프리카를 대표하느냐”는 질문은 늘 함정이 있다. 아프리카는 단일국가가 아니라 대륙이고, 대표성은 선언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남아공이 가자 이슈를 국제사법재판소(ICJ)로 끌고 가 “국제법의 언어”로 싸움을 건 순간부터, 남아공은 사실상 이렇게 말한 셈이 됐다. “아프리카는 더 이상 구경꾼이 아니라, 세계 질서의 판정자席에 앉겠다.” 이 선언의 배경에는 도덕적 분노만큼이나 계산이 깔려 있다. 그리고 그 계산은 대륙 밖(미·EU·중·러)만이 아니라, 대륙 안(아프리카 내부의 맹주 경쟁)에서도 작동한다.
먼저 “인종이 반반 섞였느냐”는 지점부터 정리해야 한다. 남아공은 ‘다인종 국가’가 맞지만, 구성비는 ‘반반’이 아니라 흑인(Black African)이 약 82%로 다수이고, 백인은 한 자릿수(약 7%대), 유색(Coloured)·인도/아시아계가 그 사이를 이룬다. 남아공 정부(Statistics South Africa)도 2024 중간추계에서 유사한 비율을 제시한다. statssa.gov.za+2gov.za+2
다만 인구 비율과 권력·자산 비율은 다르다. 로이터가 지적하듯, 아파르트헤이트 종식 이후에도 경제·고용·관리직 비중에서 인종 격차는 뚜렷하게 남아 있다. Reuters+1
이 간극이 남아공 외교를 읽는 열쇠다. 즉 남아공의 ‘대외 도덕 프레임’은 국내에서 끓는 불평등·분열·정치적 불만을 “통합 서사”로 묶어낼 유혹을 가진다.
남아공이 아프리카의 “맹주 야욕”이 있냐고 묻는다면, 답은 이렇게 쪼개야 한다. 남아공은 군사 패권처럼 노골적인 형태로 ‘제국’을 꿈꾸는 국가는 아니다. 하지만 정치적·규범적 리더십(normative leadership)은 분명히 추구해왔다. 이것은 “대륙의 경찰”이 되겠다는 뜻이 아니라, 대륙이 세계에 요구할 의제를 남아공이 먼저 문장으로 만들고, 국제무대에서 선점하겠다는 뜻이다. 아프리카연합(AU)의 장기 비전인 ‘Agenda 2063’ 자체가 “아프리카의 글로벌 협상력 강화, 다자기구 개혁, 아프리카의 공통 입장”을 강조한다. African Union+1
남아공의 ICJ 행보는 이 의제와 같은 문법을 공유한다. “우리는 피해자이기만 하지 않겠다. 규칙을 말하겠다.” 그러나 남아공이 곧바로 “아프리카 대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아프리카 내 ‘맹주 경쟁’은 원래 다극적이다. 남아공(남부), 나이지리아(서부), 이집트(북부), 에티오피아·케냐(동부)가 각자의 방식으로 영향권을 갖는다. 여기에 알제리·모로코, 그리고 사헬의 군부 정권 축까지 들어오면, 대륙의 리더십은 단일 왕좌가 아니라 지역별 연합과 순간의 이슈가 만드는 ‘유동적 의제 리더십’이 된다. 그래서 남아공이 가자를 들고 나왔다는 건 “맹주 선포”라기보다, ‘의제 주도권을 잡는 방식의 맹주’를 시도하는 것으로 읽힌다.
여기서 가자는 왜 유독 유용한가. 남아공의 대이스라엘 ICJ 소송은, 단지 중동전쟁의 옳고 그름을 다투는 사건이 아니라, 국제법의 가장 강한 언어(집단학살협약)를 통해 “세계의 도덕적 이중잣대”를 겨누는 창이 된다. ISS(Institute for Security Studies)는 남아공의 ICJ 제기가 남아공의 외교 공간을 바꾸고, 지지와 반발을 동시에 불러오며 외교 선택지를 재배치한다고 분석했다. ISS Africa
또한 학술·정책 연구들은 남아공의 ICJ 행보가 “반(反)제국주의/반식민주의” 정체성을 강화하고, 해방운동의 역사(아파르트헤이트) 서사를 팔레스타인과 연결하는 정치적·정체성적 효과가 있음을 짚는다. Security Praxis+1
즉, 가자는 남아공이 “아프리카의 역사적 상처(식민·인종차별·강제통치)”를 21세기 국제정치 언어로 재번역하는 데 최적의 소재다. 그렇다면 “이들이 단순히 정권 획득(국내 정치)만 노리느냐”는 질문은 절반만 맞다. 국내 정치는 분명히 있다. 불평등과 성장 둔화, 실업과 사회 불만이 쌓일수록, 정권은 외부의 도덕 전선을 통해 내부 결속을 얻고 싶어진다. 로이터가 묘사한 ‘30년 뒤에도 남은 불평등’은 남아공 정치가 언제든 정당성 위기에 노출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Reuters
하지만 동시에 남아공의 가자 행보는 “정권 이벤트”를 넘어 대륙 외교의 장기 전략, 즉 글로벌 사우스의 ‘규범 전쟁’에서 자리를 확보하는 시도로 볼 여지도 있다. 프랑스국제관계연구소(IFRI)는 남아공의 ICJ 활용을 “중견국의 로포어(lawfare)적 접근”으로 다루며, 법을 통해 상징과 실리를 함께 쌓는 전략성을 분석한다. ifri.org
이 지점에서 아프리카 내부 판도도 움직인다. 가자 이슈가 아프리카 전체의 단일 입장을 만들지는 못하지만, 남아공은 “아프리카가 글로벌 규범의 청중이 아니라 발화자”라는 프레임을 대륙 내부에도 확산시킨다. 그리고 이 ‘발화자’ 자리는 경쟁적이다. 어떤 국가는 이를 지지하며 함께 목소리를 높이고(대륙의 규범 리더십 강화), 어떤 국가는 조용히 거리를 둔다(서방 원조·안보 협력, 국내 분쟁 관리). 이 내부의 다층적 계산 때문에, 남아공은 “아프리카 대표”를 자처하기보다 “아프리카가 세계에 말할 수 있는 무대”를 키우는 방식으로 자신을 중심에 놓으려 한다. AU의 평화·안보 구조(PSC)가 ‘아프리카의 집단적 안전 보장’ 틀을 갖춘 것도, 대륙이 스스로를 주체화하려는 설계다. African Union+1
이제 질문은 21세기 아프리카가 어디로 가느냐다. 큰 방향은 이미 “다극적 거래 시장”이다. 미국, 중국, 러시아, EU, 걸프 국가들이 모두 아프리카에 들어와 각자 다른 방식으로 영향력을 확장한다. AU와 BRICS 담론은 “다극 질서에서 아프리카의 협상력”을 강조해 왔고, 관련 연구들은 BRICS-아프리카 의제가 Agenda 2063과 결합하며 투자·인프라·교역 확대를 ‘다극 협상’으로 정당화해왔다고 설명한다. Valdai Club+2bricspf.parliament.gov.za+2
남아공은 바로 이 다극 시장에서 “중개자이자 상징”을 노린다. 서방과도 거래하고, BRICS에도 발을 담그며, 국제법 프레임으로 도덕적 우위를 주장해 ‘발언권’을 확보한다. 하지만 여기에 큰 역설이 있다. 남아공은 이스라엘을 ICJ로 끌고 가면서도, 현실 경제에서는 이스라엘과의 거래가 완전히 끊기지 않는다. 로이터는 남아공이 이스라엘을 비판하는 동시에 이스라엘로의 석탄 수출이 늘어난 정황을 전하며, 남아공 외교의 “원칙 vs 이해” 긴장을 보여준다. Reuters
이 역설은 남아공만의 문제가 아니라, 다극체제 아프리카 전체의 문제다. 아프리카는 도덕의 언어로 주도권을 얻고 싶지만, 성장과 재정, 일자리의 언어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래서 “맹주”는 군사나 영토가 아니라, 결국 의제 생산 능력(규범) + 시장 접근 능력(경제) + 안보 조정 능력(지역 분쟁 중재)을 동시에 가진 국가로 굳어질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아프리카에서 “맹주를 자처할 세력”은 누가 남나. 가장 현실적인 답은 단일국이 아니라 이슈별 맹주다. 안보와 분쟁 중재는 어떤 때는 에티오피아·케냐·나이지리아가, 에너지·지중해 축은 이집트·알제리가, 규범·국제법 전선은 남아공이 주도권을 갖는 식이다. 남아공의 ICJ 행보는 그 중 “규범 전선의 맹주”를 노리는 강한 시그널이며, 가자는 그 전선에서 가장 폭발력이 큰 소재였을 뿐이다.
결국 남아공이 가자를 통해 유럽과 미국에 “아프리카 목소리”를 내는 배경은, 단순한 반서방 선동이 아니라 다극체제에서 ‘말할 권리’(voice) 자체가 자원이 되었기 때문이다. 군사력이 약한 국가가 세계 질서에 개입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식은, 규칙을 말하고, 규칙을 해석하는 자리에 올라서는 것이다. 남아공은 그 자리를 노린다. 그리고 그 시도는 대륙 내부의 경쟁을 자극하면서도, 동시에 아프리카가 21세기에 어떤 방식으로 세계 정치에 들어갈지—“원조의 대상”이 아니라 “규범과 거래의 플레이어”—를 보여주는 시험대가 된다.
참고문헌
- Statistics South Africa, Mid-year population estimates 2024 (인구집단 구성비). statssa.gov.za
- Government of South Africa, South Africa’s people (인구 추계 및 공식 설명). gov.za
- Reuters, The racial divide in South Africa’s economy (경제·고용·관리직 인종 격차). Reuters
- Reuters, Thirty years after end of apartheid, equality eludes South Africa (불평등·정치 정당성 압력). Reuters
- Institute for Security Studies (ISS Africa), South Africa’s ICJ case has already altered its foreign policy space (외교 공간 재편 분석). ISS Africa
- African Union, Agenda 2063 Framework Document (대외 협상력 강화·다자기구 개혁·아프리카 공통 입장). African Union
- IFRI, Middle Power Lawfare: South Africa and Palestine (중견국의 국제법 활용 전략). ifri.org
- Security Praxis, Solidarity Across Struggles… (아파르트헤이트 서사와 팔레스타인 연대 프레임). Security Praxis
- CSIS, The Weight of History and Alliances in South Africa’s Geopolitical Turbulence (BRICS·다극질서 맥락). CSIS
- Reuters, South Africa boosts coal exports to Israel after Colombia ban (원칙-이해 긴장 사례). Reut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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