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경쟁력 담론: ‘시민 이재명’이라는 표현이 던지는 정치적 의미
[해설 논평]
AI 초격변의 시대다. 기술 낙관주의자들은 초인공지능(ASI)을 새로운 번영의 문으로 묘사한다. 손정의 같은 글로벌 기업인은 인류의 한계를 넘어서는 미래를 약속한다. 그러나 기술의 언어가 화려해질수록, 시민의 일상은 그만큼 조용히 흔들린다.
최근 경향신문 사설은 이 간극을 정확히 짚는다. 기술의 미래를 논하는 자리에서 대통령은 ‘국가 경쟁력’이 아닌 ‘시민’을 언급했다. 사설은 이를 단순한 수사가 아니라 정치 언어의 방향 전환으로 읽는다. ‘대통령 이재명’이 아니라 ‘시민 이재명’을 호출한 것이다.
이 표현이 던지는 질문은 단순하다.
AI는 누구를 위해 발전하는가?
이미 우리는 알고 있다. AI는 중립적인 기술이 아니다. 채용 시스템에서 탈락자를 가르고, 콜센터에서 노동을 대체하며, 의료·치안·금융의 판단을 자동화한다. 기술은 효율을 높이지만, 그 효율의 비용은 언제나 약자에게 먼저 전가된다. 실직, 차별, 감시, 책임의 공백. 이 모든 것이 “혁신의 부산물”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된다.
문제는 제도다. 내년 시행될 인공지능기본법은 이름과 달리 기본에 충실하지 않다. 고위험 AI에 대한 명확한 기준도, 피해가 발생했을 때 시민을 보호할 실질적 장치도 부족하다. 감정 인식, 얼굴 인식 같은 위험 기술은 여전히 회색지대에 놓여 있다. 기술은 질주하는데, 법과 책임은 뒤처져 있다.
이 지점에서 ‘시민’이라는 단어는 정치적 무게를 갖는다. 시민은 소비자가 아니다. 데이터 제공자도 아니다. 시민은 기술 발전의 결과를 떠안는 존재이며, 동시에 그 방향을 결정할 권리를 가진 주체다. 사설이 말하는 시민은 보호의 대상이 아니라 판단의 주체다.
그러나 한국 사회의 AI 담론은 아직 산업 중심이다. 경쟁력, 투자, 선점, 속도. 이 단어들 사이에서 시민의 불안은 부차적 문제로 밀려난다. 기술을 늦추자는 것이 아니다. 기술을 사회 안에 묶어두자는 요구다. 민주주의는 기술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해도, 최소한 방향은 통제해야 한다.
‘시민 이재명’을 응원한다는 말은 곧 이런 주문이다.
대통령이 기술 앞에서 기업의 대변자가 아니라, 시민의 언어로 말하라는 요구.
국가 전략이 성장 그래프가 아니라 삶의 안정에서 출발하라는 요구.
기술은 미래를 약속하지만, 민주주의는 현재를 책임진다.
AI의 시대에 정치가 해야 할 일은 혁신을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그 혁신이 시민을 해치지 않도록 속도를 늦추고 질문을 던지는 일이다.
기술은 선택이 아니다. 그러나 그 기술이 어떤 사회를 만드는지는, 여전히 선택의 문제다.
출처: 경향신문, “‘시민 이재명’을 응원하며”, 사회 에디터 손제민, 2025.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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