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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력과 유통망 ‘스트리밍 제국’에 던진 유럽의 역공… ‘시리즈 주권’ 깃발 올린 유럽평의회

유럽이 마침내 칼을 빼 들었다. 영화는 규칙이 있고 극장은 제도가 있었지만, 정작 전 세계 여론과 구독료, 제작 질서를 좌우하는 시리즈 산업은 오랫동안 플랫폼의 자본력과 알고리즘 앞에 방치돼 있었다. 그런데 2026년 3월 26일 프랑스 릴에서 열린 시리즈 마니아 포럼에서, 유럽평의회가 **‘시리즈 공동제작 협약’**을 공식 서명 개시하며 판을 흔들기 시작했다. 알랭 베르세 유럽평의회 사무총장은 이 틀을 “시리즈를 위한 첫 국제 프레임워크”라고 설명했고, 독립 제작자 보호와 시장의 예측 가능성 제고를 전면에 내세웠다.

겉으로 보면 문화 협력 선언처럼 보인다. 하지만 속내는 훨씬 더 노골적이다. 유럽은 지금 넷플릭스, 아마존, 디즈니 같은 초대형 비유럽 플랫폼이 자본과 유통망을 장악한 구조에서, 자국 창작 생태계가 하청화되는 것을 더는 두고 볼 수 없다는 신호를 보낸 셈이다. 유럽평의회는 이번 협약을 두고 TV와 스트리밍 시리즈의 독립 공동제작을 위해 마련된 최초의 국제 법적 틀이라고 규정했고, 국경 간 협력 강화, 독립 제작자 지원, 투명성 확대를 핵심 목표로 제시했다.

이 협약의 진짜 의미는 “좋은 이야기를 더 많이 만들자” 수준이 아니다. 핵심은 누가 돈을 대고, 누가 권리를 쥐고, 누가 최종 편집권과 글로벌 유통의 문을 통제하느냐에 있다. 지금까지 유럽의 많은 제작사는 글로벌 플랫폼 자본을 끌어오지 않으면 대형 시리즈를 만들기 어려웠고, 그 대가로 지식재산권과 배급 통제권, 심지어 창작 방향까지 넘겨야 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이번 협약은 그 불균형을 단번에 뒤집지는 못해도, 적어도 공동제작의 기준과 분쟁 가능성을 더 명확히 해 “플랫폼이 정한 룰만 따르는 시장”에서 “국가 간 합의된 룰이 작동하는 시장”으로 한 걸음 옮기려는 시도다. 이는 유럽평의회가 직접 “greater transparency and predictability”, 즉 더 큰 투명성과 예측 가능성을 강조한 데서도 읽힌다.



상징성도 크다. 이번에 프랑스, 조지아, 그리스, 이탈리아, 룩셈부르크, 몰타, 몬테네그로, 폴란드, 포르투갈 등 9개국이 먼저 서명했다. 아직 발효까지는 최소 3개국 비준이 필요하지만, 적어도 유럽은 “영화 공동제작 협약”이 만들었던 제도적 성공을 시리즈 분야로 확장하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했다. 베르세는 시리즈가 우리 시대를 규정하는 문화 형식 가운데 하나라고 강조했고, 남은 회원국들과 비회원국들에도 동참을 촉구했다.

여기서 더 흥미로운 대목은, 이 협약이 단순한 문화 행정 문서가 아니라는 점이다. 이는 사실상 유럽판 ‘콘텐츠 안보’ 선언에 가깝다. 에너지와 반도체, 방위산업만 전략산업이 아니다. 사람들의 사고방식, 정치 감수성, 국가 이미지, 언어 시장, 스타 시스템을 좌우하는 시리즈 역시 전략산업이다. 유럽이 뒤늦게나마 “시리즈도 주권의 문제”라고 선언한 것은, 플랫폼 시대 문화정치의 본질을 뒤늦게 인정한 셈이다. “알고리즘의 지배에 저항한다”는 취지의 베르세 발언도 결국 같은 맥락이다. 추천 알고리즘이 작품을 고르는 순간, 시장은 문화 경쟁이 아니라 데이터 독점 경쟁으로 변질되기 쉽기 때문이다.

물론 현실은 녹록지 않다. 협약이 생긴다고 해서 곧바로 넷플릭스식 선투자 구조가 무너지거나, 유럽 독립 제작사들이 단번에 주도권을 되찾는 것은 아니다. 규범은 생겼지만 돈은 여전히 플랫폼에 있고, 글로벌 구독자 접점도 플랫폼이 쥐고 있다. 따라서 이번 협약은 혁명이라기보다 늦었지만 필요한 방어선에 가깝다. 다만 방어선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하다. 이제 유럽 제작사들은 최소한 “규칙이 없는 협상장”이 아니라 “국제적 합의가 존재하는 협상장”으로 들어가게 된다.

결국 이번 서명식은 문화 뉴스가 아니라 산업 뉴스이고, 더 정확히는 시장 권력에 대한 제도적 반격이다. 그동안 플랫폼은 국경을 넘어 이야기를 유통하며 ‘세계화의 엔진’처럼 포장돼 왔지만, 그 이면에는 제작비 종속, 권리 집중, 알고리즘 편향, 로컬 창작 생태계의 약화가 함께 진행돼 왔다. 유럽이 이번에 내민 협약은 “우리는 더 이상 단순 하청 기지가 아니다”라는 선언문에 가깝다. 시리즈는 이제 오락이 아니라 외교이고, 산업이며, 문화 주권의 전선이다. 그리고 유럽은 뒤늦게 그 전선에 참전했다.

참고문헌

  • Council of Europe, Nine countries sign new Council of Europe Convention on series co-production at Series Mania, 2026-03-27.
  • Council of Europe, Secretary General to chair opening for signature of new Convention on the Co-production of Audiovisual Works in the form of Series, 2026-03-26 / 2026-03-16 공지.
  • Series Mania Forum, Signature of the new Council of Europe Convention on the Co-production of Audiovisual Works in the form of Series.
  • Variety, Alain Berset on Convention on the Co-Production of Audiovisual Works in the Form of Series, 2026-03-27 검색 결과 발췌 기준.

Socko/Gh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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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을 세계로, 세계를 한국으로- Socko is a Korean editorial writer analyzing geopolitics, economics, and power structures with clarity, depth, and a touch of refined satire. From local politics to global shifts, Socko delivers commentary that informs, questions, and challenges. Socko는 국제정치·경제·권력 구조를 깊이 있게 해석하는 한국의 에디토리얼 라이터로, 정교한 풍자와 분석을 통해 세상의 본질을 드러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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