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리즘과 다문화주의, 누가 ‘규칙 기반 국제질서’를 위해 목숨을 거는가…
“아무도 규칙 기반 국제질서를 지키기 위해 전쟁터로 달려가지 않는다.” 미국의 보수 성향 매체 《아메리칸 싱커》에 실린 J.B. Shurk의 글은 서구 정치권이 당연한 전제로 삼아온 국제질서의 언어를 정면으로 겨눈다. 민주주의, 다양성, 포용, 다문화주의, 국제 규범. 현대 서구 정치가 도덕적 정당성을 설명할 때 즐겨 사용하는 단어들이다.
그러나 국가가 전쟁을 준비하고 국민에게 희생을 요구하는 순간, 질문은 달라진다. 무엇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가. 관료조직인가, 국제회의에서 채택된 문구인가, 아니면 자신이 살아온 사회와 다음 세대에 물려줄 자유인가. Shurk의 문제 제기는 여기서 출발한다. 국민에게 국가를 위해 희생하라고 요구하면서 정작 국가가 무엇이며,…
국민을 하나로 묶는 가치가 무엇인지 설명하지 못한다면 애국심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이 질문은 미국의 보수 진영에만 해당하지 않는다. 러시아의 군사적 위협에 대비하며 국방비와 병역 의무를 논의하는 유럽에도, 동맹과 억지력에 국가 생존을 걸고 있는 한국에도 가볍게 넘길 수 없는 물음이다. Shurk의 논지는 단호하다.
모든 문화와 종교, 국가를 차이와 무관하게 동등하게 존중해야 한다는 도덕적 명제가 현실 정치에서 절대 원칙처럼 작동하면, 사회가 지켜야 할 기준 자체가 흐려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글로벌리즘과 다문화주의가 서구 문명의 역사적 기반을 부정하고, 국가 정체성을 약화시키며, 그 결과 국민에게 방어할 이유조차 설명하지 못하는 정치적 공백을 만든다고 주장한다.
이 비판에는 검토할 가치가 있는 대목이 있다. 서로 다른 문화가 공존할 수 있다는 사실과 모든 관습·행위가 똑같이 정당하다는 주장은 전혀 다르다. 종교의 자유는 타인의 자유를 침해할 권리가 아니며, 문화적 차이에 대한 관용도 폭력과 강압을 면책하는 근거가 될 수 없다. 이민자에게도 법을 준수하고 사회의 기본 규칙을 존중할 책임이 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특정 종교나 출신 집단 전체를 서구 문명의 적으로 규정한다면 논리는 스스로 무너진다. 법과 보편적 권리를 지키자는 주장과 특정 집단을 일괄적으로 배척하자는 주장은 같은 것이 아니다. 문명을 지킨다는 명분이 문명의 핵심 가치인 개인의 존엄과 법 앞의 평등을 훼손한다면, 그것은 방어가 아니라 자기부정이다.
뉴욕의 조란 맘다니 시장과 이민세관단속국(ICE)의 총격 사건은 이 논쟁을 구체적인 현실로 끌어내린다. 2026년 10월 8일 뉴욕 마블힐에서 ICE 요원들이 체포 작전 중 도미니카공화국 출신 남성을 총격해 다치게 했고, 당시 차량에는 다섯 살 어린이도 타고 있었다. 연방 당국은 대상자의 범죄 이력과 체포 과정에서의 위험을 강조했지만,…
맘다니 시장은 요원들의 작전 방식과 총격을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사건 당시 알려진 사실이 불분명하다고 밝히면서, 어린이가 타고 있던 차량을 둘러싼 작전의 정당성과 투명성을 문제 삼았다. [로이터, 2026년 10월 9일; 뉴욕시장실, 2026년 10월 8일] Shurk는 이 사건을 불법 이민자와 경찰의 대립을 넘어 미국의 국가 정체성이 흔들리는 사례로 해석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사실과 정치적 해석을 분리해야 한다. 총격을 당한 남성의 범죄 이력과 이민 신분은 체포 및 사법 절차에서 검토할 사안이지만, 그것만으로 총격의 정당성이 자동 입증되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이민자라는 이유만으로 법 집행의 책임을 면제할 수도 없다. 법치주의는 범죄 혐의자에게 책임을 묻는 원칙인 동시에 공권력에도 법적 한계를 요구하는 원칙이다.
국가의 권위는 무조건적인 경찰 편들기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동일한 법적 기준을 적용하는 데서 나온다. 그렇다면 맘다니 시장이 부상자를 ‘뉴요커’라고 부른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Shurk는 이를 미국 태생 시민과 외국 출신 이민자, 그리고 불법 체류 범죄 혐의자를 구별하지 못하는 정체성의 혼란으로 읽는다.
그러나 시민권과 출생지, 거주지, 범죄 책임은 서로 다른 기준이다. 미국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이 법을 위반할 권리를 주지 않듯, 외국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이 공동체의 일원이 될 가능성을 영구히 박탈하지도 않는다. 합법적 귀화 시민은 미국의 정식 시민이며, 시장이라는 공직을 맡았다는 이유만으로 그의 출신 국가를 문제 삼을 수도 없다.
진짜 쟁점은 외국 출신이라는 사실이 아니라, 공직자가 법 집행과 공공안전, 인권을 어떤 원칙으로 판단하느냐다. 맘다니의 발언은 이민 단속과 공권력 행사에 관한 정책적 논쟁의 대상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그의 우간다 출신 배경이나 이슬람 신앙을 근거로 그가 미국인으로서의 정당성을 결여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정책 비판을 정체성 공격으로 바꾸는 일이다.
국민을 하나로 묶는 기준이 혈통과 출생지뿐이라면, 미국이 오랫동안 내세워온 시민권과 헌정질서의 의미 역시 좁아질 수밖에 없다. 이민 문제에서 서구 사회가 직면한 현실적 고민을 외면해서도 안 된다. 국경 통제는 국가 주권의 기본 기능이며, 이민 제도는 수용 능력과 노동시장, 공공서비스, 치안, 사회통합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
법을 지키며 정착하려는 이민자와 폭력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을 같은 범주로 취급해서는 안 되지만, 인도주의를 내세워 불법 체류나 범죄에 대한 책임 문제를 무기한 미룰 수도 없다. 영국과 유럽에서 이민 규모, 사회통합, 종교적 자유, 여성과 소수자의 권리를 둘러싼 갈등이 이어지는 것도 이런 복합적인 문제 때문이다.
그러나 이민자 전체가 범죄를 저지르거나 특정 종교를 가진 사람은 서구 사회와 공존할 수 없다는 식의 주장은 사실에 근거한 정책 분석이 아니다. 범죄는 개인의 행위와 증거에 따라 판단해야 하며, 종교적 신념 역시 구체적인 행동과 구별해야 한다. 사회통합을 위해 필요한 것은 무조건적인 수용도, 집단 전체에 대한 낙인도 아니다.
명확한 입국·체류 규칙, 일관된 법 집행, 언어와 시민교육, 성평등과 종교의 자유를 포함한 헌법적 가치의 준수가 함께 작동해야 한다. 관용이 법의 포기를 뜻하지 않듯, 국경의 수호도 인간에 대한 차별을 정당화하지 않는다. 이제 논쟁의 중심에 있는 ‘규칙 기반 국제질서’를 다시 보자. Shurk는 관료조직과 추상적인 국제 규범을 위해 누가 목숨을 걸겠느냐고 묻는다.
그 질문에는 정치 지도자들이 답해야 할 빈틈이 있다. 국제질서 자체가 국민에게 희생을 요구하는 신앙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 하지만 국제 규범을 지키는 일이 곧 국가의 생존과 무관하다는 결론도 성립하지 않는다. 주권과 영토 보전, 무력 사용의 제한, 국제법의 준수는 약소국이 강대국의 힘에 일방적으로 굴복하지 않도록 하는 최소한의 방파제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비롯해 무력으로 국경과 주권을 바꾸려는 행위에 국제사회가 아무런 원칙도 적용하지 않는다면, 그 비용은 유럽에만 머물지 않는다. 대만해협과 한반도처럼 군사적 억지력과 동맹이 중요한 지역에도 파장이 미칠 수 있다. 한국은 규칙 기반 국제질서를 추상적인 구호로만 받아들여서도 안 되고, 쓸모없는 관료주의로 치부해서도 안 된다.
국제 규범이 실제로 침략을 억제하고 동맹의 신뢰를 지키며 국가의 선택권을 보장하는 데 기여하는지 따져야 한다. 국민은 ‘질서를 지키라’는 말만으로 전쟁을 감수하지 않는다. 그 질서가 자신과 가족의 자유, 국가의 독립, 다음 세대의 안전을 어떻게 지키는지 납득할 수 있어야 한다. 결국 Shurk의 글이 던지는 가장 무거운 질문은 글로벌리즘의 승패가 아니다.
국가가 국민에게 희생을 요구할 때, 그 희생을 정당화할 공동의 가치가 남아 있느냐는 것이다. 서구 문명은 기독교적 유산과 계몽주의, 법치주의, 개인의 자유, 국민국가의 역사 속에서 형성돼 왔다. 그 유산을 무조건 부정하는 것도, 과거의 모든 관습을 성역화하는 것도 답은 아니다. 문명은 비판과 개혁을 통해 살아남지만, 자기 사회가 무엇을 지키려 하는지 설명하지 못할 때에는 방향을 잃는다.
국가의 경계는 지도 위의 선만이 아니며, 시민권은 단순한 행정적 지위만도 아니다. 그것은 권리와 의무, 자유와 책임, 공통의 법 아래 살아간다는 약속을 포함한다. 그러나 그 약속은 출신이나 종교가 다른 사람에게도 동일한 법적 존엄을 인정할 때 비로소 설득력을 얻는다. 한국 역시 예외가 아니다.
안보를 위해 국민의 희생을 요구하면서 국가가 지켜야 할 원칙을 설명하지 못한다면 애국심은 구호로 소진될 것이다. 반대로 국가 정체성을 지킨다는 이유로 법과 자유의 원칙을 훼손한다면, 지켜야 할 문명의 핵심을 스스로 무너뜨리게 된다. 아무도 추상적인 국제질서만을 위해 목숨을 걸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자유와 주권, 법치와 공동체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서는 희생을 감수할 수 있다. 정치가 해야 할 일은 그 차이를 국민에게 정직하게 설명하는 것이다.
Socko/Gh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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